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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노노케 히메를 다시 보다 (기억, 고민, 여운)

by cocoji 2025. 4. 9.

영화 <모노노케 히메> 포스터
영화 <모노노케 히메> 포스터

 

모노노케 히메, 그 이름만 들어도 뭔가 묵직한 감정이 떠오르는 사람들이 있을 거예요. 사실 저는 이 영화를 중학생 때 처음 봤어요. 그땐 솔직히 “이게 뭐야?” 싶었거든요. 그림은 예쁜데, 내용은 잘 모르겠고, 그냥 신기한 동물들 나오고 싸우고 그런 영화인 줄만 알았죠.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어느 날 밤 조용한 방에서 이 영화를 다시 틀었을 때, 전혀 다른 영화가 되어 있더라고요. 처음 보는 것처럼 낯설고, 동시에 너무 친숙했어요. 그렇게 이 영화는 제게 ‘다시 보는 영화’가 됐어요. 인생의 시기마다 새로운 얼굴로 다가오는 작품, 모노노케 히메에 대해 오늘은 조심스레 꺼내보려 해요.

 

처음부터 이상하게 마음이 조용해졌어요

처음 장면부터 뭔가 분위기가 달라요. 아시타카가 저주를 받고, 마을을 떠나야 할 운명이 되잖아요. 근데 그 장면이 굉장히 담담하게 그려져요. 누군가는 눈물 흘리고, 누군가는 말을 아끼는데, 그 모든 게 현실적이어서 더 먹먹하게 다가왔어요. 슬픈 장면인데, 오히려 그 조용함 때문에 더 아프게 느껴졌달까요. 어떤 위로의 말도 없이 등을 돌리고, 말없이 떠나는 모습이 마음을 툭 치더라고요.

아시타카라는 캐릭터는 정말 이상한 힘이 있어요. 누군가를 휘어잡거나 강하게 주장하지 않는데, 말 한마디, 눈빛 하나로 사람을 움직여요. 특히 산과 처음 마주하는 장면에서 “당신은 아름다워요”라고 말하는 순간은, 너무 조용해서 오히려 크게 들렸어요. 아무리 다시 봐도 그 대사만큼은 늘 새로운 감정으로 다가와요. 사람을 평가하거나 설득하려 하지 않고, 그냥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시선이 너무 인상 깊었어요.

어쩌면 그게 이 영화가 주는 독특한 감정일지도 몰라요. 격렬한 장면 속에도 늘 한 발 물러나 있는 감정선. 그래서 더 공감되고, 그래서 더 아프게 다가오는 것 같아요. 한 장면 한 장면이 끝나면 가슴속에 작은 돌 하나가 놓이는 것처럼 여운이 남아요.

 

이 영화는 누가 선이고 누가 악인지 모르겠어요

애초에 그런 기준으로 나눌 수 없는 이야기예요. 보통은 악당이 나오고, 주인공이 그들을 물리치고, 해피엔딩으로 끝나죠. 근데 모노노케 히메는 그런 틀에 맞지 않아요. 처음엔 에보시 부인이 나쁜 사람인가 싶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 판단이 애매해져요. 병자들을 돌보고, 사회에서 소외된 이들을 받아들여 마을을 만든 사람인데, 동시에 자연을 파괴하고 전쟁을 불러오죠. 그게 과연 ‘악’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요?

산은 자연의 화신이자 인간에 대한 분노의 상징이에요. 그녀의 눈빛은 늘 날카롭고, 말보다는 행동으로 말하죠. 하지만 그 안에도 고통이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어요. 특히 아시타카를 대할 때, 서서히 무너지지 않으려 애쓰는 감정이 보여서 안타까웠어요. 그 누구도 완전히 옳거나, 완전히 틀리지 않다는 걸 이 영화는 너무 잘 보여줘요.

그리고 아시타카는… 음, 그는 진짜 ‘중간의 사람’ 같아요. 판단하기보다 이해하려고 하고, 싸우기보다 대화를 원하죠. 그래서 때론 답답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그 태도 덕분에 이 영화가 단순한 전쟁 이야기가 아니라, 복잡하고 현실적인 인간 이야기로 남게 되는 것 같아요. 아시타카가 없었다면, 이 영화는 그냥 전쟁 이야기로 끝났을지도 몰라요.

 

애니메이션이라고 하기엔 너무 깊고, 아름다워요

이건 그냥 애니메이션이 아니에요. 정말 그림으로 만든 시 같다고 해야 할까요. 배경 하나하나가 숨을 쉬고 있어요. 숲속에 피어오르는 안개,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 달빛 아래 빛나는 물결들까지. 마치 그 세계가 실제로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졌어요. 한 번은 영화를 멈추고 그 장면을 캡처해서 가만히 바라본 적도 있어요. 그 정도로 아름다웠거든요.

그리고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건 숲의 신이에요. 처음엔 도깨비처럼 생긴 괴물인가 했는데, 나중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존재로 다가오더라고요. 경외심, 두려움, 슬픔… 모든 감정이 동시에 느껴졌어요. 그 존재가 죽으면서 숲이 무너지고, 그 위로 뿌려지는 생명의 씨앗들. 그 장면은 몇 번을 봐도 가슴이 먹먹해져요.

음악도 빼놓을 수 없어요. 장면에 흐르는 음악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음악이라는 걸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스며들어요. 조용한 장면에서 들리는 현악기 소리, 클라이맥스에서 터지는 오케스트라. 이 모든 게 이야기와 완벽하게 맞물려서 감정을 증폭시켜줘요.

모노노케 히메는 ‘봐야 할 영화’가 아니라, ‘다시 보고 싶은 영화’ 예요. 단순히 좋은 영화라서가 아니라, 인생의 시기에 따라 다르게 느껴지는 영화라서요. 어릴 땐 그냥 신기하고 무서운 동물들이 나오는 판타지였고, 스무 살 땐 인간과 자연의 갈등이 마음에 들어왔어요. 지금은 그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는 인간의 내면이 더 크게 느껴지더라고요.

아마 몇 년 후에 다시 본다면 또 다른 감정이 찾아오겠죠. 그래서 이 영화는 명작인 것 같아요. 끝이 없는 이야기처럼, 계속해서 내 안에서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영화. 누군가 아직 이 영화를 안 봤다면, 꼭 한 번은 봤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언젠가 다시 보게 됐을 때, “아… 이런 영화였구나” 하며 마음 깊은 곳이 울리는 그런 경험을 하게 될지도 몰라요.